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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드보로작(Antonin Dvorak)의 관하여

드보로작(Antonin Dvorak)


넬라호제베스 태생의 보헤미아(체코슬로바키아) 작곡가로서 프라하 근교에서 여관과 정육점을 경영하는 프란치세크의 장남으로 태어 났다.모친은 그 고장 영주인 로브크비츠 공의 성 집사의 딸이었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으려 하던 시기인 1882년 때의 모습인 드보르작크

그는 일찍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으나 부친은 자기 가업을 계승시킬 생각으로 12세 때 여관과 정육점을 경영하기에 필요한 독일어를 가르치고자 즈로니체에 보냈다. 거기서 드보로작은 독일어 교사이며 오르간 주자이기도 했던 리만(Antonin Liemann)에게서 음악이론과 오르간,피아노 연주법에 관해서 배웠다.

부친은 끝까지 가업을 계승시키려 하였으나 리만이 설득한 덕택으로 1857년에 프라하로 나올 수 있었으며 오르간 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고 음악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리스트,바그너,베를리오즈 등의 음악을 접할 기회도 가졌다. 졸업 후 콤 자크(Karel Komzak)의 밴드에서 연주하며 생호할을 하다가 1862년부터 체코 가설극장 관현악단에서 비올라 주자로 10년간 활동 했다.

1866년 이후 스메타나(Bedrich Smetana)가 지휘자로 부임하여 영향을 받았다. 드보로작은 이 무렵 약간의 급료와 피아노 레슨으로 얻은 얼마 되지 않은 수입으로 어려운 생활이었으나 꾸준히 작품을 썼다, 그가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던 체르마크(Cermak)의 딸 요제피나(Josefina)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실연한 후 그 슬픔을 담은 18개의 가곡집 <측백나무(Cyprise)>를 65년 7월에 완성시켰는데 그 주제는 그의 여러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드보로작의 이름이 최초로 비평가들의 주목을 끈 작품은 민족의 제재를 다룬<백산의 후계자들(Dedicove Bile Hory)>로서 1873년 흘라홀에서 연주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요제피나의 동생으로 뛰어난 알토 가수였던 안나 체르마코바(Anna Cermakova)와 결혼했다.

1874년에는 단막 오페라<완고한 자들(Tvrde Palice)>로 갓가설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으므로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는 "젊고 가난하고 재능이 있는 예술가"의 국가 보조금에 작품을 제출하여 이를 받게 되었다. 브람스가 그 심사위원 가운데 있었는데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1877년에는 <모라바의 2중창(Moravske dvojzpevy)>을 출판 하도록 하였고 이어<슬라브 무곡(Slavonske tance)>제 1집도 출판되었다.

드보로작이 사용하던 피아노

그 무렵에 사랑하는 세 아이를 잃은 슬픔(두딸과 아들을 사고와 질병으로 잃음)도 있고 해서 이 때에 만들어진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는 그의 걸작의 하나가 되었다. 드보로작은 1884년부터1896년 사이에 9회나 영국을 방문하여 대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891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드보로작은 조용한 곳을 좋아하여 85년 봄에는 프라하 서남쪽 고원 지대인 비소카 마을에 별장을 만들고 여름에는 이 곳에 파묻혀 작곡에 전념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48세인 1889년8월에서11월 사이에 이곳에서 제 8번 교향곡,작품 88 G장조를 작곡 하였다. 1890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하여 차이코프스키와 친교를 맺기도 했으며 프라하의 카테르 대학으로 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이곳에서 노바크.스크등의 제자를 배출시키는 등 교육자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1892년 뉴욕 국민 음악원 창시자인 자네트 더버(J.Thuber)여사로부터 동음악원의 초대원장이 되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주저 하였으나 결국은 승낙하여 그 해 9월15일에 아내와 6명의 자녀 가운데 2명을 데리고 프라하를 떠나서 26일에 뉴욕에 도착하였다.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서 받은 가장 강한 인상은 교향곡 제9번<신세계<New world)>작품 95 e단조 첼로 협주곡 등의 걸작을 낳았으며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아메리카 민요나 흑인 영가 등에서 감동을 받아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지 나타내 보려 하였다. 1895년에 귀국하여 다시 프라하 음악원의 작곡 교수가 되고 그 후는 교향곡과 실내악을 떠난 오직 교향시와 오페라 작곡에만 몰두하였다. 마지막 3개의 오페라 가운데에서도 시적인 <루살카(Rusalka)>는 그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되었다.

1901년에는 오스트리아 종신 상원의원으로 추대되었으며 또한 프라하 음악원 원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최후의 오페라<아르미다(Arimida)>는 별로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그 초연 후 얼마되지 않은 5월 1일에 신장병으로 급사 하였다.

중세의 면모가 엿보이는 체코 프라하-드보로작은 여기서 생을 마감한다.

드보로작은 슈베르트와도 비견이 되는 많은 작품의 천재로서 샘솟는 듯한 악상으로서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타입의 작곡가였다.그 때문에 수많은  작품중에 매우 뛰어난 것과 별로 중요치 않는 것이 뒤섞여 있다. 초기에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영향을 복 수있으며 바그너와 리스트에 열중했던 시기에는 체코적인 것을 상실할 것 같은 경향을 보인 적도 있었다.그러나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패배한 오스트리아가 체코에 대한 압력을 완화 시켰을 무렵 체코의 민족운동이 높아지자 작곡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던 드보로작은 그 후의 작품엑서 체코적인 혹은 슬라브적인 것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기악곡에 프리안트,소세카,둠카 등의 민족무곡을 채택하고 있는 점과 교향시와 오페라의 전부가 슬라브의 제재에 의존하는 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흑인 영가나 아메리카 민요로 채색된 미국 시대의 작품도 단순히 이국적 정서인 미국음악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체코적인 음악으로서 통용되고 있음을 볼 수있다.

체코에 있는 블라디슬로바의 오페라 하우스

드보로작의 음악적 특성은 기악곡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형식은 고전주의의 전통을 답습하면서 기본적음악 언어는 브람스 낭만주의에 가깝다. 그의 음악은 보헤미아적인 향토색이 느린 악장에서 더욱 뚜렸이 나타나며 풍부한 선율에 색채적인 화성을 구사하는 관현악법이 뛰어나다.

인간으로서의 드보로작은 어떠한 곤경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건강한 사람이었고 신에 대한 존경,또한 자연과 조국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정열이 그의 작품의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