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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에 관하여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1685-1757)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바로크와 로크크의 경계선에 위치하는 작곡가로서"근대적 클라비어주법(피아노)의 아버지"라 불리며 알렉산드로와 더불어 동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이다.

도메니크 스카를라티(1685-1757)

최초 오페라<꼭 닮은 사람.1679>이 대성공했던 덕분으로 당장에 로마의 귀족 사회에 알려지고 그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뒤에는 오랫동안 나폴리에서 활약했다고 하지만 언제나 로마의 귀족들을 위해 계속 많은 작품을 썻다고 한다. 그밖의 오페라 3곡,오라토리오,칸타타,교회작품도 로마시절에 쓰여지고 있다.1684년6월경 부터 왕실 악단의 악장으로 임명되었다.이 후 1703년까지 이 지위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 동안 실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1705년<Lucio manlio>가 제88곡째의 오페라라고 한다.

1689년 한동안 로테도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레오빈치, 두란테 등이 그에게서 배웠다는 증거는 없고 나폴리 악파의 오페라 작곡가 중 하세만은 그에게 배웠다.1703년~08년의 대부분은 로마에 머물렀었는데 교회측의 반대로 오페라가 융성하지 못했으므로 주로 칸타타와 오라토리오 작곡에 전념했다.1701년 16세때에 그의 아버지가 궁전 악장으로 있던 궁정 예배당에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이 때 오페라 곡<오타비아><지우스티노>등을 발표했다.

1708년 베니스에 가서 가스파리니에게 사사받고 이무렵 헨델을 알게되어 오르간과 챔발로의 기술을 서로 겨루었다. 그 결결과 오르간에서는 헨델에게 승리를 양보했지만 챔발로에서는 자웅을 가리기 어려워 이후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며 함께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한편 그는 폴란드의 마리아 카지미라 여왕의 오페라 작곡가로 있으면서 로마에 있는 왕비의 소극장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왕비가 로마를 떠난 후 1715년 산 피에르트로 사원의 악장이 되었는데 여기서는 교회음악의 작곡에 힘썼다.1714년 왕비가 로마를 떠난 뒤 포르투칼 대사 데 폰테스 후작의 악장 자리를 얻어 거기서 교회음악 작곡에 종사했다. 스카를라티는 교회음악과 축전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에게 쳄발로를 가르치고 그 뒤 평생을 걸쳐 마리아 바르바라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오늘날 현존하는 약 555곡의 쳄발로소나타는 모두가 이 왕녀를 위하여 씌어졌다고 한다.

도메니크 스카를라티의 아버지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초상

1724년 잠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는데 1729년 마리아 바르바라가 스페인의 왕자 페르난도에게 출가하자 그녀를 따라서 스페인으로 옮겼다.1738년에는 마드리드에 이주, 같은 해 포르투칼 궁정에서 직위를 받았는데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쳄발로 곡집]을 헌정했다.마드리드로  옮긴후에도 1742,49,52,59년에 왕비를 위한 쳄발로 곡집을 출판했는데 이 무렵에 쳄발로를 가르친 제자의 한 사람이 솔레르 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소프라노와 현악 합주를 위한 사르베 레지나>라고 한다. 스카를라티의 음악 활동은 그 작품으로 보아 두시기로 나뉜다. 최초의 시기는 아버지 알렉산드로가 죽은 1725년까지 혹은 그가 결혼을 위해 귀국한  1728년까지이다. 이 시기의 작품은 교회음악과 오페라 칸타타가 주체이고 양식적으로 당시 이탈리아 작곡가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제2의 시기는 1729년 스페인으로 옮긴 해 부터 시작된다. 이때부터 그는 이탈리아 바로크의 다성적 저음기법에서 떠나 로코코적 개성에 넘치는 독창적 작품을 개척했으며 수많은 쳄발로곡을 남겼다. 그 중 특히 알렉산드로 롱고에 의해 정리되고 롱고번호로써 알려진 쳄발로 소나타 및 연습곡이 중요하며 클라비어 소나타의 근원이 되고있다.

 

Ana Vidovic plays Sonata in E major K 380 by Domenico Scarlatti on a classical guitar

쇼팽이나 드뷔시의 음악이 피아노 특유의 어법을 잘 살렸던 것처럼 스카를라티의 음악은 쳄발로의 특유의 어법에 잘 맞는다. 쳄발로의 음향으로 가능한 모든 미묘한 음영과 기교를 그의 소나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떤것들은 엄청나게 어려운 기교파 곡인가 하면 어떤것들은 조용한 목가적인 악장들로 되어 있으며 그 분위기는 매우 다양하고 대중적인 노래와 이탈리아,포르투칼,스페인의 춤 리듬의 자취가 스며들어 있다.

그의 소나타들은 세상의 수많은 음향과 광경을 흡수하여 승화시켰기 때문에 또한 짜임새와 화성을 음향 효과의 견지에서 자유롭게 취급하였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인상주의적이라고 표현 할 수있다. 또 다성 음악적 짜임새와 화성적 짜임새의 갑작스런 대비라든가 이에 못지 않게 눈을 끄는 로코코적 장난스러움으로부터 바로크적 강렬함으로의 변화가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스카를라티의 쳄발로곡은 최근들어 쳄발로 연주가이며 스카를라티의 연구자로 알려진 커크페트릭의 정리 번호에 따라 커크페트릭 번호로 불리워지기도 한다.그의 음악은 대게 둘, 또는 네 마디의 대칭적 구조로 배열된 명백한 악상으로 구성된다.

 스카를라티는 종전까지 나폴리 악파의 시조로 인정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몬테베르디로부터 시작되는 시기의 최후에 위치하여 그 이전의 양식 발전 및 방향 전환 작업 가능성을 포괄적으로 받아들인 대작곡가로서 재인식하게 되었지만 뒷날 나폴리 악파의 거장들과의 사제 관계는 없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폴리악파의 특유한 규칙적인 장면 구성이라든가, 자기 목적화한 성악의 명인기 등은 스카를라티의 오페라에서 볼 수 없는 반면 작곡법은 "우선 첫쨰로 음이 만들어 내는 하모니를 말의 뜻이나 모방에 맞추어 정리하는것이다"라는 그의 견해가 모든 양식 요소에 적절히 베어있다.

1758년에 만들어진 실내 오르간. 스카를라티는 오르간 연주에도 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몬테베르디나 후일의  17세기 거장들과도 다르지 않은 견해이다. 또한 스카를라티는 오페라를 "음악에 의한 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탈리아 서곡 형식 다카포 아리아,오케스트라 반주법,레시타티브,반음계나 화성,선율,리듬의 처리법,악기편성법,성악의콜로다투라 등이 이들 요소가 그의 손을 거쳐 바로크 음악의 최종 목적에 도움이 되고 있다. 칸타타라는 장르를 명확히 내건 800곡에 이르는 실내 칸타타,12의 심포니아,실내악곡,모테토,미사,마드리갈,가곡ㄷ 등이 있다.

그는 1717~22년 로마에 체류하여 카프라니카 광장에서 만년의 작품인 일련의 오페라를 공연했고 그 후 1722년에 나폴리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스카를라티는 당대의 위대한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며 뛰어난 양식의 감각을 갖고 있던 무한한 상상력의 예술가 였다.

주로 쳄발로(피아노)의 악기가 최적화 된 그의 곡들을 근대에 들어서 많은 클래식기타리스트들이 편곡하여 연주하고 있고 쳄발로 못지 않게 스카를라티가 보여주려했던 음악의 면모를 기타를 통해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