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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바흐에 (Johann Sebastian BachJohann Sebastian Bach )관하여

요한 세바스챤 바흐 (Johann Sebastian Bach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종교적인 신조를 몸소 구현시킨 위대한 오르가니스트겸 불세출의 대 작곡가이다. 아이제나하 태생의 독일 작곡가로 생존시에는 오르간의 명연주자로서 또한 대위법 교사로서 유명하였다.

<3성의 카논> 악보를 들고 있는 j.s Bach-1685-1750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가업으로 한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을 부친으로 부터 배우고 1695년 부친이 사망한 후에도 오르간의 명수 파헬벨의 제자이며 오르도르프에서 살고 있던 형의 가르침을 받았고 1700~1702년에 걸쳐 뤼네부르크의 학교에서 소년 소프라노 가수를 하고 있을때 쉬츠의 제자인 레와 라인켄으 제자 뵘이라는 두 사람의 오르가니스트를 알게되어 뵘으로 부터 북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음악 양식을 배웠다. 오페라의 중심지인 함부르크에 가서 직접 라인켄의 가르침을 받거나 첼레시의 궁정을 방문하여 프랑스 양식의 관현악을 가까이하기도 하였다.

1703~7년까지는 아른슈타트의 성 보니파티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있었는데 이 사이에 북스테후데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뤼베크 시를 영행한 바 있으며 1707~8년에는 게오르크 아데의 후계자로서 뮐하우젠의 오르가니스트의 지위에 있었다. 그 자신은 루터적인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의 전통파였으나, 뮐하우젠의 교회의 목사는 다른 파에 속해 있어 괴로움을 받았다. 그곳에 있을 때 궁정의 오르가니스트의 자리가 비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옮겼고 1714년에는 궁정 악장이 되었다.

이 궁정에서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새로운 세속적인 음악이 환영받고 있어서 바흐는 특히 이탈리아의 콘체르토 양식에서 큰 자극을 받았고 1717년~23년은 쾨텐의 궁정에서 악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 궁정의 영주는 칼뱅파의 신앙을 가졌었고 예술적인 교회 음악이 행하여 지지는 않았으나 바흐는 세속적인 실내악이나 가정음악 등을 많이 작곡하였고 1720년의 여름에 그는 첫번째 아내인 마리아 바르바라를 잃었지만 이듬해에 안나 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이 하였다.

 

from suite No 1 for Violoncello Solo Prelude BWV1007 연주-이승규(기타치는 디지털 노마드)

바흐의 음악은 구약성서에 비교하기도 하거니와 음악 감상에 있어서도 바흐의 작품에서 시작하여 다시 바흐의 음악으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바흐는 18세기 바로크시대의 모든 음악악의 경향을 집대성했는데 뒤따라올 베토벤과 바그너의 순독일풍의 세계 음악을 만들어 내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바흐와 헨델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음악 역사상 획기적인 하나의 전환점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발전해 온 작곡가의 기교가 두 사람에 의하여 완성되었던 것이기 때문 이다. 바흐느 그 위대한 창작 활동으로서 오늘의 음악과 직결 시켰으며 새로운 음악 시대의 실마리를 풀어 놓았다.

바흐의 집안은 북중부 독일의 튀링겐 지방에 뿌리 박은 큰 가문이다. 이 가문은 1580년 부터 19세기의 걸친 여섯 세대에서 우수한  음악가들을 놀랄 만큼 많이 배출하였다. 바흐는 아이제나하의 촌락 음악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오르가니스트요 파헤벨의 제자였던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 기숙하면서 첫 음악 훈련을 받았다.

성 토마스 교회 안에 있는 바흐의 묘                                                 바흐 박물관 내부모습

그의 능력은 날로 발전하여 음악에 대한 의욕은은 더욱 높아졌고 형의 집에는 당시의 새로운 악보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그러나 형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바흐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그러나 바흐는 몰래 악보를 꺼내어 가족들이 잠이 든 틈을 타서 달빛을 이용하여 사보를 했다. 이와 같이 바흔느 다른 작곡가의 악보를 모방하거나 또한 편곡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음악을 배웠는데 이 습관을 평생동안 유지하였으며 이 방식으로 그는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선구적인 작곡가들의 양식과 친숙하여졌으며 각자의 우수한 점을 터득하였다.

 

Menuett-l,ll 연주-이승규(기타치는 디지털 노마드)

18세 때의 바흐는 이미 훌륭한 음가대열에 합류 하였고 22살때부터는 32세까지의 시기를 바이마르 시대라 한다. 그는 바이마르 공의 예배당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서 후에는 악사장(concert master)등을 역임했고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도 했다. 

32세 때 바흔느 쾨텐으로 가서 쾨텐공 궁정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바흔느 여기서 주로 오케스트라곡을 많이 작곡했는데 쾨텐의 영주는 열광적인인 음악 애호가였고 그의 악단도 우수 했다고 전해진다. 바흔느 이곳에서 많은 합주곡을 작곡 하였으며 38세까지 악장으로 있었는데 이 기간을 쾨텐 시대(1717~1723)이라고 한다. 이 시절의 바흐는 즐거웠으나 좋은 오르간이 없었으므로 다른 교회로 이직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루터 교회의 상당히 중요한 직책이었던 성 토마스 학교의 지휘자이자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고 38세부터65세까지의 27년간을 라이프치히시대(1723~1750)라고 한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회,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 일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바흐는 많은 합창곡,오라토리오,칸타타,수난곡,오르간곡 등 많은 작곡을 하엿다. 그의 가정 생활은 비교적 즐거웠고 굳은 신앙심을 가졌으며 신에게 봉사하는 일에 몸을 바쳤다. 그는 오직 신을 찬미하기 위해 작품을 썼고 "음악이야 말로 신에게 가까이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흐는 건강한 몸이었으나 젊었을 때 과로했던 탓인지 시력이 점차 쇠퇴해졌으며 다른 병도 뒤따라 생기기 시작 하엿다. 그는 64세 때에 눈을 두 번이나 수술했으나 마침내 소경이 되어 65세로 생을 마쳤다.

그가 생애를 마치기 전 마지막 5년간의 행적은 주위세계로부터 점차적으로 자기의 고독 속으로빠져 원숙한 경지에서 훌륭한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다. 고금을 통한 변주곡 중에서 최대의 거걸작인<골트베르크 변주곡>이나 <이탈리아 협주곡>은 그의 라이프치히 시대의 대표작이었고 6개의 트리오 소나타는 오르간 음악의 대표작이라 할 수있다. 또한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된 1747년의 베를린 방문때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거장을 맞이한 기쁨에 여장을 한 그대로 바흐를 맞아 영접하였고 바흐는 대왕이 준 주제에 의해 즉흥 연주를 훌륭하게 해 보였닥다고 전한다. 이여행이 끝난 뒤 그는 이 주제에 의하여 <음악의 헌정>을 작곡하여 대왕에게 바쳤다. 그 후 최후의 미완성은 그가 세상을 따나기 2년전 부터 쓰기 시작한 <푸가의 기법>이다.

바흐는 살아 있는 동안과 죽은 뒤 얼마동안은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대위법 교사로만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남방적인 카톨릭으로 재인식된 팔레스타리나에 대항하여 북독일 낭만파가 "독일적인 바흐"를 내세운 이래 그의 음악이 재인식 되었고 1829년 멘델스죤에 의하여 베를린에서<마태 수난곡>의 연주가 바흐 부흥의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후부터 독일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존경 받는 대음악가로 인식되었다.열광적인 바흐의 찬미는 독일에서 1930년 이후부터 약간 떨어졌다고 하지만 우상화되지 않는 참 모습 그대로의 바흐는 오히려 인간적인 면에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로크시대의 여러가지 현악기를 제작하는 모습

[아른슈타트 시대 1703~8년] 1703년 4월에는 바흐는 바이마르의 궁정 악단에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취직했다. 겨우 3개월의 짧은 기간이긴 했으나 그는 이곳에서 바이올린 악파의 대가 베스트호프(Johann Paulvon Westhoff1656~1705)를 알게 되어 독일 바이올린악파의 다성적 연주법을 배울 수 있었다. 바흐가 원했었던 것은 한낱 궁정악사가 아니라 집안의 거의 모두가 차지했던 바 있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지휘였다. 그의 희망은 성취되어 1703년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했다. 이 고장은 세바스티안의 조부인 크리스토프 이후 바흐 일족과 관계가 깊었으며 세바스티안이 취직했던 "신교회"(현재의 "바흐교회")에서는 새로 만들어진 성능능 좋은 오르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방에서 연주하고 있는 음악가 그룹의 판화

이 고장의 당국자들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18세인 그에게 당시로서는는 이례적인 높은 급료를 주기도 했다.오르가니스트로 일하는 한편 성가대를 훈련시키는 것도 그의 임무였으나 혈기 왕성한 그는 젊은 대원들과 충돌하여 어떤 때는 대원중 한 사람과 거리에서 난투극을 벌인 일도 있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1707년 10월에 바흐느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아른슈타트에서 사귀었던 6촌 누이동생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했다.훗날 이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자녀 가운데 장남"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카를 필리프 에마뉴엘"은 특히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했다.

바흐의 장남 프리데만이 조피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던 드레스덴

[바이마르 시대1708~1717] 바이마르 시대를 그의 "오르간곡 시대"라고 구분 하기도 한다.바이마르에서의 바흔느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정도 행복했으며 교우 관계도 원만했었다. 1708년 경부터 4년여동안 아이제나하에서 악사장의 지위에 있었던 유명한 작곡가 텔레만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는 바흐의 차남 에마뉴엘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이 무렵 바흐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사건이 일어 났다. 그것은 바흐가 1717년 9월에 당시의 대도시 드레스덴을 방문했을때의 일로서 거기에는 때마침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인 루이 마르샹(Luwis Marshand 1619~1732)이 와 있었는데 사람들은 두 사람의 경연을 원했지만 마르샹은 바흐의 실력을 두려워하여 도망치고 말았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실제로 도망쳤는지 여부는 알 수없지만 바흐의 명성을 말해 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쾨텐 시대1717~1723] 1717년3월 바흐는 쾨텐의 궁정악장으로 임명 되었으나 바이마르의 사표가 좀처럼 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실제로 바흐가 쾨텐으로 옮긴것은 그해 연말이었다. 그리고 세속적인 기악곡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대중 합주곡이 수십곡 작곡 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애석하게도 그 대부분은 없어지고 말았다.

갖가지 다양한 장식들로 꾸며놓은 남독일의 바로크 양식 사원

바흐는 일찍부터 헨델의 작품을 알고 그를 높이 평가했는데 바흐가 런던으로부터 헨델을 만나기 위해1719년10월에 할레를 갖았지만 이 두 거장은 평생을 두고 서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말았다.이듬해인 1720년에 쾨텐에서의 행복한 생활에 하나의 슬픈 그림자를 깃들이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영주를수행하여 뵈멘의 피서지 카를스바트에가 있는 동안에 13년을 함께 살았던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일이었다. 그 마음의 상처에서 생활의 변화를 꾀하려 했음인지 그해 10월에 바흐는 함브르크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지원했다.12세의 장남을 비롯하여 네 자녀를 부양해야 할 35세의 바흐는 1721년 12월에 새 아내를 맞이했다. 그녀는 재능있는 소프라노 안나 막달레나로서 바흐보다 나이가 16세나 어렸다. 이 아내는 헌신적으로 남편에게 봉사하며 바흐의 작품을 사보, 정서한 것도 많은데 그 필적은 바흐의 것으로 착각할 만큼 흡사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무려 13명이나 되었는데 특히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바흐도 젊은 아내의 애정에 보답하여 2권으로 엮은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클리비어 소곡집[ Clavier Buchlein vor Anna Magdalena Bach1722~1725]를 썼다.

쾨텐시대 바흐이 칸타타 창작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은데 신년과12월10일의 레오폴드 공작의 탄생일에는 대중 칸타타가 연주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칼뱅파였던 그 고장의 교회를 위해 1년에 2곡 정도의 교회 칸타타가 씌어졌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뮐하우젠 (M메리안 작) 성 블라시우스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취직 했는데 교회 내분으로 인해 금방 그만 두고 말았다. 바흐는 그의 최초 칸타타를 이곳에서 지휘했다.

{라이프치히 시대 1723~1750] 1722년 6월 라이프치히의 토마스교회 칸토어로 있었던 유명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의 사망으로 시 참사회는 그 후임을 찾고 있었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텔레만이나 그라우프너가 후보의 물망에 올랐으나 두 사람은 모두 사양했다. 시 참사회는 "가장 우수한 인물을 얻을 수 없으므로 중류급의 음악가로 참아야만 한다"는 의견으로 마지막에 바흐를 선택했다. 라이프치히 봉급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으며 합창단의 능력은 낮고 규율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바흐의 완고한 성격은 자주 상사와으 충돌을 초래했다. 이러한 악조건은 바흐의 교회 음악 일에 대한 정열을 차차 잃게 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1730년 전후부터 교회음악의 작곡이 급격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1730년 8월 참사회는 바흐의 직무 태만만을 비난하여 감봉 처분을 결정하고 바흐가 시 참사회에 제출한 교회음악의 개선안은 완전히 무시 당했다. 그 해 10월에는 바흐는 젊었을때 친구인 에르트만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의 딱한 처지를 호소하고 다른 고장에서의 취직을 부탁했다. 그러나 매주 일요일 그리고 중요한 축일의 예배식을 장식한 바흐의 칸타타는 신앙심 두터운 라이프치히 시민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매력이었으며 또 그 성과는 그들의 중요한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칸타타는 군주인 작센 선제후 등의 탄생일이나 성명축일 그리고 대관을 축하하기 위해서도 상연되었다. 또 당시의 라이프치히에서 크게 유명한 카페 하우스에서는 바흐의 지휘에 의한 콜레기움 무지쿰이 협주곡이나 오케스트라곡 뿐 아니라 칸타타도 상연했다.이를 교회에서 연주하기 위해 씌어진 칸타타는 "대중 칸타타"라고도 불리우는데 가사의 상위 그리고 당연히 코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음악적으로는 "교회 칸타타"를 개정하여 새로운 가사를 맞추어 넣음으로써 만드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거침 없이 통하는 창작법을 음악회에서는 "바흐의 파로디 기법"이라고 부르고 있다.바흐의 칸타타 창작의 황금기는 의심할 바 없이 라이프치히 시대이다.

1723년 38세의 바흐는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학교의 합창대장으로 취임했다. 사진은 슈만,멘델스죤 시대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라이치히의 거리

마스 칸토어라고 하는 지위를 얻은 바흐는 일요일마다 예배식을 거의 자작의 칸타타로 장식하려는 뜻을을 세우고 1723년 5월30일 삼위일체절 이후 제1일요일부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물론 바이마르 시대에 작곡한 것도 재연을 했고 때로는 마이닝겐의 친척인 요한 루트비히 바흐(Johann Ludwig Bach 1677~1731)의 작품도 상연했는데 그로부터 2년간 1725년 5월27일 삼위일체 축일까지와 1725년12월25일 크리스마스로부터 1726년 11월24일 삼위일체절 후 제 23일요일에 이르기까지의 약 3년분의 칸타타 상연이 거의 그치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교회 음악에 전념한 1723년부터 1729년까지를 라이프치히 제 1기라고 본다면 이에 계속되되는 제2기는 콜레기움 무지쿰용의 기악곡이나 세속 칸타타에 의해 집약되나 대략 1736년 무렵부터 바흐의 창작 활동은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여 라이프치히 제 3기라고 할 수있는 시대에 들어간다. 이 시기의 현저한 경향은 이전에 써놓은 곡을 개정하거나 몇 가지 작품을 곡집의 형태로 정리하거나 또는 그것들을 출판하는 일이었다.

취리히의 독일어 대학 콜레기움 무지쿰의 칸타타 연습

1726년 이후 한 곡씩 세상에 내놓았던 6곡의 파르티타(BWV825~830)를 한데 묶어 <클라비어 연집"Clavierubung">을 제 1권으로 출판 (1731) 하여 곡 인정받았고 그 뒤 1735년에 <이탈리아 협주곡 (BWV971)>과 <프랑스풍 서곡 (BWV831)>을 포함하는 제 2부가 1739년에는 <오르간 미사 (BWV552,669~802~805)>라고 불리는 제 3부가 그리고 1742년에는<골드베르크 변주곡(BWV988)>이 제4부로 잇달아 출판되었다. 그리고 비록 출판 되지는 않았으나<평균율 클라비어곡 집 제 2권(BWV870~893)>도 여러 시기에 작곡된 곡을 1744년에 정리한 것이며 이밖에도 오르간 코랄의 개정이 적지 않다.

바흐의 생애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일화는 1747년의 포츠담 방문이다. 프로이샌의 프리드리히 2세의 쳄발로 주자로 근무하던 차남 에마뉴엘의 중계로 그해 5월 바흐는 이 유명한 계몽군주의 궁정을 방문했다. 왕은 바흐를 환영했고 바흐도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즉흥 연주의 묘기를 들려 주었다. 이를 동기로 하여 태어난 것이 <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 BWV 1079)>이다. 건강한 것으로 알려진 바흐도 노경에 이르러 오랜 세월을 두고 쌓인 피로는 극복 할 수 없었을것이다.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의 고생으로 인한 과로가 원인이 되어 시력마저 쇠퇴하고 있었다. 그 해 1749년 5월말에 일어난 뇌일혈의 발작과 함께 그의 시력은 급속히 감퇴하여 그 뒤부터 직접 곡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 해졌다."푸가의 기법"이 중단되고 미완성인 채로 남겨진 것은 그 때문이다. 1750년 3월말부터 4월에 걸쳐 두 차례의 눈수술을 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바흐는 끝내 시력을 완전히 상실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에 사용했던 약이 오히려 해해가 되어 몸도 급격히 쇠약해 졌다. 제자 "알트니콜"(Johann Christoph Altnikol1720~1759)과 그의 아내인 바흐의 딸이 아버지의 위급함을 듣고 근무지인 나움부르크에서 달려왔다.

1724년 초연 되어졌던 <성 요한 수난곡>BWV245의 자필 악보

7월 18일 무렵에 한때 시력을 회복했으나 다시 뇌일혈의 발작을 일으켜 바흐는 10일 후인 1750년 7월28일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바흐는 음악 형식의 개혁자도 아니며 새로운 발견을 한 사람도 아니다.그러나 9세기경부터 6백여 년 간을 성장해 온 대위법 음악을 완성한 데에는 공헌한 바는 크다. 그의 대위법적인 음악은 베토벤과 브람스등 고전파,낭만파 시대에까지 계속되었으며 쇤베르크,힌데미트 그밖의 현대 여러 작곡가의 기법에 있어서도 새 형태로서 소생하는 감이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이르러서 교회음악은 물론이고 대중가요 째즈 팝 등 모든 분야에서 바흐의 영향력이 펼쳐지고 있다.

바이에른의 이즈마닝 성의 프라이징공 궁정 음악회(호레만스 그림의 일부,1731)플륫,바이올린,비올라,감바,하프시코드등의 악기가 보인다.

바흐의 작품 중에는 <대미사 B단조><마태 수난곡><요한 수난곡>을 비롯한 많은 성악곡과 <토카타(TOCC-ATA)와 푸가 D단조> 그 밖의 오르간곡 많은 독주곡과 중주곡,협주곡,합주곡,그리고<평균율 클라비어 곡집(Klavier)>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많다.

바흐의 음악은 숭고하고 맑고 깨끗하여 장엄한 마져 느끼게 한다.

한가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바흐 이전의 음악은 기타 비슷한(류트,기타라등) 악기들이 많이 연주되었는데 바흐시대에 대규모 음악(오케스트라)이 성행 하면서 기타가 점차 사라지며 길거리 악기로 전락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기타의 최대 약점으로 음량이 작기 때문에 대규모 음악에서는 같이 어우러 질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