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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리스트(Franz Liszt)그는 누구인가?

리스트(Franz Liszt)1811.10.22~1886.7.31


리스트(Franz Liszt)

라이딩크 태생인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피아노의 연주자인 리스트는 헝가리의 전통있는 귀족 에스테르하지의 집사로 있던 부친 아담(1776~1827)과 독일계의 여성인 모친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란츠는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아직 8세도 채 못된 1819년 9월에는 바덴에서 공연을 시작했으며 그 후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테르하지 궁전에서도 연주를 갖고 귀족들을 놀라게 했다.1820년 쇼프론에서 연주회를 개최하고 다음난 브레스부르크에서의 연주는 신문기사로 취급되었다.

부친은 후멜에게 사사하기 위해 그가 있는 바이마르에 가려 했으나 사례금이 비싸서 빈의 체르니(1791~1857)에게 사사했다.1822년1월에는 빈 악단에 데뷔하여 후멜의 협주곡과 즉흥 연주를 하여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듬해 4월 레드자르잘에서의 연주회에서는 베토벤이 소년 리스트를 끌어 안고 이마에 키스를 했다. 

부친은 프란츠를 프랑스에 데리고 가 나머지 공부를 시키려고 결심, 직업을 버리고 세 식구는 1823년9월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 온목적은 콩세르 바트와르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시를 거절 당하고 파에르(Ferdinand Paer),라이햐(Anton Reicha)에게 배우고 피아노 제조가 에라르의 후원을 얻어서 순조로운  기반을 추구해 갔다. 파리에 도착한 석달 뒤 24년3월7일에는 오페라 극장에서 독주회를 개최하여 데뷔해서 큰 성공을 거두고 명성을 얻은 후 1824년3월, 25년1월, 27년 5월의 3회에 걸쳐서 영국을 방문하여 연주 하였으며 그 사이에 프랑스와 스위스 각지에서도 순회 연주를 하였는데 이로 인한 피로로 부친인 앋아담은 휴양가는 여행길에 병을 얻어 1827년 8월 28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있는 젊은 음악가들

피아노 가정 교사로서 가르치고 있던 고관의 딸 카롤린과 사이에 첫사랑이 싹트기 시작했으나 카롤린의 부친의 반대로 두 사람은 떨어지게 되었고 번민하게 된다. 이때에 읽읽은 문학 서적과 종교서적은 후일 그의 종교 생활과 교향시 창작의 바탕을 만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시가지를 진동하는 총소리에 눈을 뜨고 다시 일어섰다.제자도 받고 무대에도 섰으며 1831년 처음으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었을때 감격하여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든가,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겠다"라고 외치고 말았다.

1833년 다구 백작 부인을 알게되어 그 당시 사교계의 화제의 촛점이 된 열렬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중 둘째 딸인 코지마는 폰 뷜러와 이혼하고 바그너와 결혼한 것으로 유명하다.<순례의 연보>라고 불리우는 피아노곡은 다구 백작 부인과 생활하는 사이에도 리스트는 빈,부다페스트 등지를 연주 여행하며 피아노계의 제1인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1847년 2월, 러시아의 키에프에서 자선 연주회를 개최했을 때 비트 갠슈타인 백작 부인을 만났으며 이듬해에 바이마르에서 동거하게 되었다.바이마르에서 그는 음악 감독과 지휘자로 활약하였고 또한 많은 음악가들을 도와 주었다. 그 예로 혁명에 가담하여 체포 직전의 바그너를 취리히까지 망명시켜 주었고 스메타나가 프라하 음악학교를 설립할 때에도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와 주었다. 바이마르 시대는 리스트로서는 가장 안정된 생활이었으며 또한 활동동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피아노를 치는 리스트와 왼쪽부터 화가 크리프바,베를리오즈,체르니,에른스트

대공비를 통하여 진행시키던 이혼 승인 문제가 어느 정도 양해가 되었기 때문에 부인인은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 하고 드디어 1860년 10월22일로 결혼식 날짜깢까지 잡았으나 부인의 러시아측 친척들이 이의를 제기하여 모든 것이 백지화 되고 말았다.그리하여 부인은 모든 것을 단념하고 리스트와 이별하게 도었으며 로마에 머물면서 신학에 정진하여 종교 생활에 들어 갔으며 리스트로 로마에 머물면서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도원에 들어간 리스트는 죽을때까지 검은 옷을 걸치게 되었다. 그의<성 엘리자베트의 전설>피아노곡<작은 새에게 얘기하는 아시지의 성 프라시스><물 위를 걷는 파울라의 성 프란시스>등 종교적인 내용을 갖는 작품은 모두 이 시절의 작품이다.

그러나 바이마르에서 복귀의 요청이 잦았으므로 리스트 자신도 그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1868년에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 만년을 전세계에서 모여든 젊고 뛰어난 천재들에게 둘러쌓여 보냈다.1886년 바이로이트에 사는 딸 코지마도 만날 겸 또한 그 해에 공연된<트리스탄>을 듣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갔을때 급성 폐렴을 일으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생애를 마쳤고바이로이트시에 안장되었다.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난 그가 만년에 살았던 바이마르의 집은 리스트 박물관으로 보존 되어 있다.

 

HUNGARIAN RHAPSODY No. 2 Franz Liszt - Solo Guitar- Intan Mayadewi Tjahjaputra

그가 남긴 작품의 수는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 작품에는 작품 번호가 붙어 있지 않다. 작품번호를 달았던 시절도 있었으나 같은 작품이라도 출판사에 따라 각기 다른 번호가 붙어 혼란을 일으켜 정리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명기하지 않앗던 것이라 생각된다. 피털터라페가 정리한 리스트의 작품은 673의 번호로서 분류되고 있으나 헝가리 랩소디 같은 경우는 전 19곡이 동일한 번호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의 수는 훨씬 더 방대하여진다.

리스트의 작품을 크게 둘로 나누어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기악곡과 관현악에 의한 교향시로 분류 할 수 있으며 피아노 곡은 대부분이 젊었을때 연주에 분류했던 거장 시절의 것으로 테크닉을 요하는 것이 많지만 그의 작품 전부가 낭만주의로 일관되어 있다. 2곡의 피아노 협주곡(Eb장조.A장조)은 모두 악장의 구분 없는 교향시풍의 것이며 b단조의 피아노 소나타도 단악장과 같은 구성이면서 연주에 30분 이상이 소요되는 대곡이다.

리스트의 바이마르 궁전 지휘자 임명서.1842년 그는 궁전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곡의 헝가리 랩소디는 마치 리스트의 대명사처럼 친근한 작품인데 이것은 그가 헝가리에서 수집한 집시 음악이나 헝가리의 민속 음악을 차르다시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써 제2번,제6번,제15번은 특히 유명하다. 그의 많은 연주회용 연습곡 <캄파넬라>를 포함하는 6곡그이 파가니니 연습곡 12곡의 초절기교 연습곡은 모두 연주회용의 것으로 쇼팽의 연습곡과 함께 낭만주의시대의 귀중한 유산이며 피아노 음악으로 엮은 기행문과도 같은 <순례의 세월>은 인상과 음악에도 길을 터 놓은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오페라의 서곡이나 오페라 아리아 가곡등으 피아노 편곡도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 대단히 소중한 레퍼터리라고 하겠다.

오케스트라 작품으로는 <파우스트 교향곡>(괴테에 의한 3개의 성격묘사)와 <단테교향곡>을 필두로 12곡의 교향시가 포함되어 주로 만년에 속하는 곡들이다. 이것들은 표제 음악적 형식과 내용을 가지며 낭만주의 시대의 교향시 음악은 리스트에 의하여 확립되었었다. 12곡의 교향시 가운데는 시나 명화의 기분을 느끼도록 그 내용을 묘사한 것이 많다.

시의 인상 묘사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마제파><이상>등이 있고 극의 공연을 위해 쓴 서곡풍의 것으로는 <타소>(비탄과 승리)<오르페우스><프로메테우스><헴릿>등이 있다. 또 한가지 만년의 작품에 속하는 <레나우의 파우스트에 의한한 2개의 에피소드>(1.밤의 행렬2.마을 선술집의 춤)은 레나웅우의 시에 의한것으로<선술집의 춤>은 보통<메피스트 왈츠>라고도 하여 피아노 독주곡으로서도 흔히 연주되고 있다.

리스트는 개인 생활에 있어서 많은 여성들과의 연애로 그의 생활을 화려하게 하는 한편 종교적인 감정에 젖어 승려직을갖는 등 다채로운 생활경험을 겪고 있어서 큰 스케일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