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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쇼팽(Frederic Chopin)의 일대기

쇼팽(Frederic Chopin)-1810.3.1~1849.10.17


쇼팽(Frederic Chopin)-1810.3.1~1849.10.17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우는 쇼팽은 바르샤바 근교의 첼라조바 볼라 태생의 폴란드 작곡가로서 폴란드에서 프랑스어 교사를 하던 부친 니콜라스 쇼팽과 폴란드 귀족 출신의 피아니스트 였던 모친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레데리크는 4세때 부터 피아노의 초보 교습을 받고 6세 때 부터 보이체프 아달베르트 지브니에게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다.8세 때에는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자선 음악회에서 공개 연주회를 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다.12세 때 부터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 요제프 엘스너에게 이론과 작곡을 배웠다.1822년 이후 쇼팽은 누구에게서도 정식 피아노레슨을 받지 않고 오직 작곡에만 전념하게 되었던 것이다.1824년 프레데리크는 중학교에 입학 했으나 거의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순전히 음악 공부에만 전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총명해서 온갖 교양을 몸에 익혔다. 특히 이 무렵에는 그는 연극과 흉내내는 재주를 발휘하였고 누이들과 함께 희곡도 창작했다.1825년 그의 처녀 작품<론도>(c단조 op.1)이 출판 된 이래 꾸준히 작곡 공부를 해온 그는 1828년 부터1829년 사이에 많은 작품을 완성 하였다.그러나 그는 연주가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후멜과 파가니니의 바르샤바 연주는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연주가로서의 출발을 결심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빈으로 가게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빈에 도착하여 변주곡<라 치 다렘 라 마노>를 출판하게 되었으며 또한 연주회도 상당한 성공을 하였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터치의 섬세함과 운지의 절묘함을 높이 샀으며 또한 작곡에도 천분이 넘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쇼팽이 그린 바르샤바 시가(1829년의 수채화)

이 무렵에 그는 바르샤바 음악원 성악과 학생인 콘스탄치아에게 연정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 첫사랑의 경험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어서 피아노 협주곡 f단조 아다지오 및 왈츠 d단조 (op.7,no.3)를 작곡하게 되었다. 일시 귀국했던 쇼팽은 1830년년 순회 연주를 떠나는데 그해 가을에는 빈에 도착했다. 그러나 빈은 그에게 이있어많이 변화되어 그를 후원해 주던 음악가들은 대부분 빈을 떠나 있었거나 타계한 후였으며 악보 출판사들도 냉담했다. 거기에다 조국 폴란드의의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러시아의 교전 상태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고독과 실의에 빠진 그는 빈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는데 그 도중 9월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을때 바르샤바 함락 소식을 듣고 절망한 나머지 오늘날<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연습곡 op.10,no.12를 작곡했다고 한다. 1831년 9월에 쇼팽은 파리에 도착했는데 조국 폴란드에 호의적인 파리시민과 유수한 음악가들이 집결된 파리의 분위기에 이끌려 런던행을 단념하고 파리에 머물기로 작정한 당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로시니와 게루비니와도 만났으며 저명한 피아니스트 칼크 브렌너의 연주에 감명을 받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엘스너를 비롯한 그의 새로운 친구 멘델스죤,리스트 등으로부터 반대도 있고 하여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친구들이 반대한한 이유는 전통적이고 구태의연한 칼크 브랜너의 주법에 나타나는 쇼팽의 독창성을 손상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상하는 일이 없이 칼크 브랜너는 물심 양면으로 쇼팽의 뒤를 돌봐 주었으며 쇼팽의 데뷔 연주회에 찬조 출연도 했다.

 

쇼팽의 녹턴(기타연주,편곡-기타치는 디지털 노마드 이승규)

당시의 파리는 혁명의 영향으로 사사상적으로나 행동적으로나 세계에서 가장 자유스러운 도시였다. 따라서 세계적인 사상가, 문화인,예술인의 집결지가 되었으며 그 결과 낭만주의 운동을 문학,음악,회화에도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쇼팽은 이 물결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인데 그것은 곧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으며 그의 연주의 깊이도  더하여 주었다. 쇼팽의 제1회 연주회도 얼마쯤은 성공을 가져왔는데 그의 연주를 비평가는 페티스는 "그의 선율에는 영혼이 있다.그의 피큘레이션에는 현람함이 있고 독창성이 있는 데에다가 전아하고 유창하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화려함이 있다. 다만 음랴이 다소 부족한 것이 흠일 뿐이다."고 말했다.

그의 경제 생활은 매우 궁핍했기 때문에 빈곤을 타개하기 위하여 한때는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리의 노상에서 고향의 후원자였던 발렌티 라지빌 공을 만나게 됨으로써 빈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쇼팽을 로스틸드 남작의 "소아례"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연주하게 되었다. 그 즈음 그의 연주는 세련된 양식과 그의 악곡에서 우러나오는 환희감 또한 그의 터치와 운지의 화려하고 우아함이 여러 귀족들을 매혹시켜 귀족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쇼팽에게 레슨을 받게 하였다. 이 때문에 쇼팽은 생활에 쫓기는 일이 없었고 작곡에 전념하였으며 그 이후 10년은 편안히 생활할 수 있게 된것이다.

상드.문필가인 그녀는 오랫동안 쇼팽의 여인이었다.

1835년 드레스덴에서 마리아 보젠스카와 알게되어 쇼팽은 그녀와 결혼 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836년 겨울 그는 리스트의 소개로 조르주 상드와 만났다. 파리 사교계의 여걸이며 유명한 여류작가인 상드는 여러 점에서 볼 때 쇼팽과는 극히 대조적인 여인 이었다. 당시 결핵을 앓고 있었던  쇼팽은 조르주 상드로 부터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작곡 활동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마호르카 섬에서 둘만의 생활을 영위하기도 하고 상드의 시골 별장이 있는 노양과 파리 사이를 완복하며 동거 생활을 했다.이런 관계는 1837년에서 1846년까지 9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이 동안에 쇼팽은 가장 원숙한 작품을 썼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인데다가 상드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두 자녀의 양육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잦아 끝내 헤어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걸친 상드와의 동거 생활에서 심신이 두루 지친 그는 병이 악화 되어 작곡도 연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만년의 제자인 제인 스털링 양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에 순회 연주차 여행했는데 그 곳의 찬 안개로 인한 치명적인 병을 얻어 파리로 돌아왔으나 그뒤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1849년 10월17일,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 위에는 1830년 그가 바르샤바를 떠났을 무렵에 보내온 조국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다. 그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귀족 출신의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으로서 그의 성격과 음악에는 두 가지 이질적인 점이 공존하고 있다. 그는 폴란드에서 성장 하였지만 음악 활동은 주로 파리에서 했다. 따라서 그의 음악도 폴란드적인 점과 프랑스적인 점이 혼합되어있다.

바르샤바 시가의 혁명전(1831년)

악곡 형식으로 폴란드 토착의 폴로네즈 및 마주르카 등을  차용한것 또한 리듬,화성,음계에 이르기 까지슬라브 특유의 동양적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악곡의 끝맺음에서 보이는 뛰어난 치밀성 또한 음악전체로서의 선명함 귀족 취향등은 훗날 그가 출입했던 파리 귀족 사회의 살롱을 여실히 반영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국 폴란드를 사랑하였으며 조국이 몰락해 감에 따라 그의 애국심은 한층 더해갔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외국의 영향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의 내심의 깊은 곳에 도사린 폴란드인의 정신은 전작품에 침투되어 있으며 왈츠든 스케르쵸든 이른바 국제적 형식을 작곡에 사용한 경우에서마저도 그의 애국심은 십분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쇼팽은 작곡가로서의 한 평생도 폴란드인의 혈통 속에 머물고 있다.

쇼팽의 박물관 사진

쇼팽의 음악이 만인을 매혹시키는 것은 그의 그늘진 인생 체험이 미묘하게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데다가 청결한 애상감이 매우 시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그는 작곡에 임함에 있어 자곡가의 생활 체험 에서 우러나온 주관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낭만주의 수법을 혐오하면서도 그의 마음음속에 충만된 울적함함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5선지 위에 옮겨 놓게 되는 것이다.

쇼팽의 생가

그는 작품의 대부분이 피아노곡으로 피아노의 천재,피아노의 시인이었다. 그는 피아노에 의한 작품 이외에는감흥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다른 분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다. 그는 연주 명인으로 어릴때 부터 연주를 통해서 작곡의 영감을 얻고 있었다. 그의 피아노곡은 동 시대의 다른 작곡가의 어떤 피아노곡과도 다른 것이다.

쇼팽은 무엇이 순수한 피아니스트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완벽한 표출을 하기 위해 고심해 냄으로서 극치의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피아노 음악의 매력은 독특하고 유일한 것으로서 피아노 음악의 정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페르라세즈 쇼팽 무덤의 뮤즈 석상

근대에 와서 쇼팽의 곡들을 기타로 편곡하여 많은 기타리스트들이 독주,중주로 연주하기도 하지만 피아노만을 사랑한 쇼팽이 오늘날의 자신의 곡을 기타로 연주하는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