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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가극 카르멘의 작곡가 비제(Georges Bizet)

비제(Georges Bizet)1838.10.23~1875.6.3


비제(Georges Bizet)1838.10.23~1875.6.3

아버지는 성악교사, 어머니는 피아니스트라는 음악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이고 1848년 10세때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 하였다. 음악원에서는 입학 전부터 사사하고 있었던 마르몬텔에게 피아노를 브느와에게 오르간과 푸가를 짐메르만에게 작곡을 배웠으나 짐메르만이 와병중에는 대리인 구노에게 강의를 받고 1853년 짐메르만이 죽은 후에는 알레비에게 사사하였다. 작곡가로서의 비제는 구노와 알레비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Carmen suite - Four Aces Guitar Quartet

1856년 칸타타<다윗(David)>을 로마 대상 작곡 콩쿠르에 제출하였으나 최우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가 연소하다는 이유만으로 제2위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57년에는 칸타타<클로비스와 클로틸드(Clovis et Clotilde)>로서 로마대상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오펜바크의 극장 주최의 현상 오페레타<미라클 박사(Le doct eur Miracle)>로 응모하여 78편 작품중에서 친구인 로코크의 작품과 함께 당선하여 부프 파리젠 극장에서 공연되어 작곡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됐다.로마 대상의 수상으로 로마에 관비로 유학하여 60년 여름에 귀국할 때까지 3년 가까이를 메디치 장에서 보냈다.

비제 만년의 집

그 사이에 2막의 코믹 오페라 <돈 프로코피오(Don Procopio)> 교향곡 오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등을 작곡하였다. 여행중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받고서 유학 중도에 파리로 돌아왔고 비제는 그후 파리에 정착하여 오페라 창작에 주력하였고 우선 1막의 코믹 오페라 <태수의 구즐라(La Guzla de l "Emir)>를 완성하였으나 발표하지 않고 1863년에는 리릭좌의 지배인 카르발의 의뢰로 3막 오페라 <진진주잡이(Les Pecheurs de Perles)>를 작곡하고 그해 9월에 공연하였다. 이것이 오페라 작곡가로서 비제의 최초로 중요한 작품이다.

그후 1865년<이반 뇌제(Ivan le Terrivle)> 1866sus<아름다운 퍼드의 처녀 (La jolie de Perth)>를 썼는데<이반 뇌제>는 5막의 야심작이긴 했지만 남의 작품의 강력한 영향을 인정하고 스스로 공연을 철회하였다. 또 이때부터 일정 수입이 없다는 불안과 예술상이거나 개인적인 번민에서 술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차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 하였다.<아름다운 퍼드의 처녀>는 1867년에 공연되었으나 성공이라 할 수는 없고 그후1871년<자밀레(Djamileh)>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곡에 손을 대기는 하였으나 <진주잡이>이상의 평판은 얻지 못했다. 다만 1869년 2월에 로마 체재 중의 회상을 담은 모음곡<로마의 추억(Souvenirs de Rome)>(나중에 교향곡"로마"로 개작되었음)이 파들루의 연주회에서 연주된 사실은 특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6월에는 은사인 알레비의 딸 주네비에브와 결혼 하였다.

카르멘 제 1막.세비아의 어느 광장에 있는 담배공장 앞에서 전개되는 한 장면

극 음악 작곡가로서의 그는 당시 아직도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였으나 1872년에는 리릭좌에서 보드빌좌로 옮긴 지배인 카르발로의 권고도 도데의 희곡<아를의 여인(L 'Arlesienne)>부수 음악 27곡을 써서 이에 성공 하엿다. 즉 극자체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호평을 받았고 그 중에서 4곡을 스스로 선택한 모음곡은 파들루의 연주회에 연주되어 청중을 매료하였다고 전하여진다.(후에 기로에 의하여 제제2모음곡이 편곡된다). 또 같은 해의 작품인 네 손용 피아노곡<아이들의 놀이(Jeux d'en-fents)>가 있으며 다음에 73년3월에는 그 중에서 관현악용으로 편곡한 <작은 모음곡(Petite Suite)>콜론 관현악단에 의하여 연주되어 비제의 명성은 겨우 올라가기 시작 하엿다. 오페라<카르멘(carmen)은 이무렵에 착수되어 다음 해에 완성되었고 75년 3월3일에 오페라 코미크좌에서 초연되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 되는 오페라의 하나인 <카르멘>도 당초에는 성공이라 말 할 수는 없었지만 3개월 후인 6월3일에 비제가 37세로 요절할 때까지 33회나 공연되고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많이 연주된 것으로서 인기는 차츰 성숙되어 가고 계속 빈에서의 공연 성공 이래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기 시작 하였다. 

비제의 생가

비제는 극 음악에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어느 것이나 등장 인물의 정화확한 표현,무대 구성의 빈틈없는 형식은 비록 오랜 것이지만 작곡 기법의 세련과 새로운 맛으로 당시의 오페라계의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으며 음악 이외에도 교양이 있으며 풍부한 감수성에다가 오페라에서는 프랑스나 독일,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의 장점을 교묘하게 받아들여 그 노력이 겨우 결실을 맺을 무렵에 아깝게도 요절 해 버린 감이 있다.

마지막 작품 <카르멘>은 이러한 그의 음악적 재능에다 후천적으로 길러진 것이 가미되어 훌륭하게 결실을 본 걸작이다.<카르멘>은 노래도 음악도 낭비가 없으며 극과 음악이 잘 융합되어 음악이 극적 내용에 적절하고 극ㅇ히 효과적이다. 그 까닭은 노래도 프랑스의 것답게샹송이나 쿠플레를 도입하였으며 악기의 개성을 잘 살린 간결한 관현악도 색채적적인 효과가 잘 되어 아름답다. 또 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국 정취가 물씬한 향기는 그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나다. 이러한 점과 그의 재치있는 조바꿈과 교묘한 동기의 활용에 의하여 멋들어진 극적 효과를 올리고 청중에게 감동을 주지만 그 박진감있는 리얼리즘은 같은 시대에 있어서나 그 뒷시대에 있어서나특히 베리즈모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오늘날의 프라하 국립극장

비제는 극 음악 이외에도 관현악곡,가곡,피아노곡 등을 남겼으나 1855년17세 때의 작품<C장조 교향곡>은 이미 비제의 개성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으며 기악 작곡가로서의 그의 일면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19세기 중엽까지의 프랑스는 오페라의 융성기로서 작곡은 오페라 이외의 것으로는 충분한 수입을 얻을수 없었으므로 피아노 연주에 탁월한 솜씨가 있던 그로서도 피아노곡보다 오페라에서의 성공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런 점은 그의 젊은 시절의 편지에서도 능히 엿볼수 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그러한 재능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카르멘>의 각 막에서 훌륭히 나타나고 있지만 특히 4막의 대단원 장면에 있어서 노래가 서로 얽히면서 합창과 관현악이 숨막힐듯이 밀집 응결하는 극적 효과에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아를 시의 상 트로핌 성당과 축제일을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

또한 음악에 지방색을 도입한 점에서도 퍽 흥미롭다.<아를의 여인>에서는 그곳의 민요를 채집하여 적절하게 안배했으며 또한 카르멘에서도 정열과 화려함을 여지없이 구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하지만 비제도 모든 낭만주의 예술가들과 마찬찬가지로 인간 개성의 해방을 갈망하는 자유분방한 정열과 구질서의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그 시대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너무나 젊어서 죽었다"라고 드뷔시도 아까워하며 말했듯이 비제는 불과 37세라는 젏은 나이로 죽었는데 관습적인 낡은 번호 오페라의 형식에 의한 카르멘을  이색적이고도 획기적 진실감이 있는 오페라로 만드는데 성공함으로써 프랑스의 국민 오페라를 확립한 의의는 매우 크다.카르멘은 드뷔시의 <펠라아스와 메리장드>와 함께 로망 롤랑이 마말하듯이 프랑스 오페라의 쌍벽을 이루는 명작으로서 그 평가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