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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감성의 베르디(Giusppe Fortunio Francesco Verdi)

베르디(Giusppe Fortunio Francesco Verdi)

1813.10.10~1901.1.27


레론코레 태생의 이탈리아 작곡가로서 북 이탈리아 지방의 여인숙 겸 식료품점을 경영하는 부친 카를로 주세페의 장남으로 태어 났다.

집이 가난하고 농가와 가까워서 농민으로서의 소박한 기질이 그의 일생을 일관하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여 마음에서의 바이올린 소리나 교회의 오르간 소리에 마음이 끌렸고 베르디의 집을 지정 숙소로 잡고 있던 바가제트라는 악사가 어린 베르디의 음악적 소질을 발견하고 부친 카를로에게 음악을 가르치도록 권하였고 후에[ 베르디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뒤 베르디는 그 악사를 찾아 보답했을정도로 어린 베르디에게는 바가제트의 조언이 그의 일생을 지배하였다고 할 수있다.

춘희(La Traviata)의 표지

7세 때에는 산 미카엘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피에트로 바이스트로키 밑에서 본격적인 음악의 기초 공부를 하였는데 음악에 대한 재능과 정열이 비상하여 1년 후에는 바이스트로키가 가르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베르디가 10세 때에는 바이스트로키가 사망하자 부친은 전부터 알고 있었던 브세트 굴지의 가문인 안토니오 바레치에 부탁하여 그곳의 구둣방에서 일하면서 브세트의 하이 스쿨에 다니게 되었다,브세트에서는 돈 피에르트로세레티에게 초보적인 문법을 배우는 한편 문학의 기초적 지도를 받았는데 이 무렵부터 바레치의 소개로 그가 주제하는 세트젯 악우협회 멤버로 들어가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피아노 2중주를 연주하여 대중적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1846년 하이에츠 그림

바레치는 양조업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이지만 파곳연주에 능해서 악우협협회 사람들을 중심으로 1816년 이래 브세트 필하모니를 조직하였는데 이 옼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산 바르톨로메오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였던 페르디난도 프로베지는 어린 베르디가 애써 악보를 필사하는것을 보고 흥미를 느껴 1825년부터 29년까지의 4년 동안 그의 조수로 일을 시키는 한편 오케스트라의 연습을 맡겼다.이 즈음에 베르디는 많은 행진곡,발레곡의 편곡을 하면서 프로베지의 지도를 받아 1828년 처음으로 자작의 <심포니아>를 발표했다.

베베르디 자신의 수기의 의하면 100곡에 달하는 행진곡외에 소 교향곡 5~6개의 협주곡,피아노를 위한 변주곡,많은 세레나데,그리고 칸타타 등을 썼는데 이 곡들은  그가 사망한뒤 그의 유언에 따라 불태웠으므로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1836년 베르디는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에 들어갔으면 브세트에서 필하모니의 일과 작곡곡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최초의 오페라 작품<로체스텔>을 완성하였다.

베르디 음악원

1837년3월 베르디는 처음으로 빌지니아라고 부르는 딸을 얻고 이듬해 7월에 아들 이치리오를 얻었으나 빌지니아는 이치리오가 출생한지 불과 1년 4개월 반 만에 죽고 말았다.이 슬픔을 잊기 위하여 1838년 9월에 가족과 함께 밀라노에 나타났는데 이 해에는 (6개의 로만스>를 썼다.

1839년 11월17일<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를 공연하여 호호평을 받았다. 이 해 10월, 아들 이치리오를 병마로 잃고 1840년 6월에는 사랑하는 아내 마저 잃게 되었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 그를 구해 준 것이 메레리와 프리마돈나 주세 스토레포니 였다. 1842년 3월 주세의 격려와 메레리의 우정에 의하여 완성된 <나부코도노조로>가 초연 되었는데 크게 성공하여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어서 1843년 2월11일에 <십자군의 롬 바르디아 인>이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고 사람들은 베르디에게서 애국적인 작품을 요구하였고 이와 같은 경향은 베르디의 전기 작품에서 뚜렸하게 나타나고 있다.

 

F. Tarrega, Fantasia La Traviata, performed by Tatyana Ryzhkova

베르디의 명성을 알게 된 베네치아의 페니체좌는 그에게 신작을 위촉,위고의 원작을 무대 감독 피아베가 각색한 <에르나니(Hernani)>를 1844년 3월9일에는 초연했는데 종전의 작품의 비교되지 않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어서 바이런 원작에 의한<두 사람의 포스카리>오를레앙의 소녀를 소재로 한 실러의 <잔 다르크>,남미 페루를 무대로 한 <아르치라>,쾨니히스베르크의 낭만파시인 자하리스 베르너의 원작에 의한 <아틸라>가 초연되었는데 특히 1846년 3월17일에 초연된<아틸라>의 "전 세계에 호소하라. 나의 이탈리아는 아직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라는 절규는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았던 것이다.

<탄호이저>의 무대가 된 동부 독일 튀링겐에 있는 발트부르크 성

1874년 3월14일 피렌체의 페르고라좌의 희망에 따라 세익스피어의 비극<멕베스>를 초연하였고 그해 7월22일에 런던에서 실러의 원작에 의한 <군도>를 빅토리아여왕의 참석하에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1848년10월25일 바이런의<해적>이 초연되었으며 <레냐노의 전쟁>은 그 다음해 1월27일 로마의 아르헨티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가 실러의 작품을 소재로 한 제 2작은 이른바 세속적 비극인 <음모와 사랑>을 카마노라가 각색한 <루이자 밀러>로서 1849년 12월8일 초연되었다.이어서 파아베의 <스타펠리오>가 그 이듬해11월16일 공연되어 대만원을 이루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았다.

베르디의 작품을 3기로 구분한다면 애국적 내용을 주제로 해서 순 문예적인 성격을 보여준<스티펠리오>까지를 제1기로 하고 1851년 이 후 그의 성숙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제2기의 해당된다.1851년 3월11일 피니체좌에서의 <리골레토>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어 유명한 테너 아리아<여자의 마음>은 공연되던 날까지 비밀로 해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날 밤부터 전 베네치아에 퍼졌다고 전한다.

베르디가 스페인 작가 구티엘레스의 희곡<일 트로바토레>에 매혹된 것은 <루이자 밀러> 전 후였었는데 그 원작을 구할 수 없어 겨우 카마노라의 각색으로 1852년 말에 완성, 이듬해 1월9일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비하여 같은 해 3월 6일 <춘희>가 초연 되었을때 실패 하였으나 초연의 실패를 감안한 재연 때부터 점점 인기를 얻어 오늘날 이 작품을 공연치 않은 가극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1855년 6월13일에<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를 파리에서 초연하여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고 후에 파르마에서 <조반나니구즈만> 나폴리에서는<투렌나의 바틸다>라 불렀으나 현재의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로 부활한 것은 1862년 이탈리아가 독립하여 외국의 검열을 면하면서 부터이다.<시몬 보카네그라>가 1857년 3월 12일에 초연 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후에 보이트의 개정을 얻고 곡도 정리하여 오늘날처럼 공연하기로 되었다. 8월16일에는<스티펠리오>를<아롤드>로 개작하여 초연 하였다.

산 아가타에서의 은거생활과 나폴리와의 계약 문제의 분쟁으로 1858년은 지나가고 이듬해 2월17일 로마의 아폴로좌에서 <가면 무도회를>를 초연했다. 1859년 주세피니와의 오랜 내연 관계도 주위의 따뜻한 옹호를 받아 정식으로 결혼했다.

베르디의 생가

그후 이탈리아 독립 정부의 카브르의 권유에 따라 1865년까지 국회의원의 요직읋 맡았고 음악 및 연극 개혁에 힘을 다했으나 정치에 생소한 그는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고는 할 수없다. 때마침 이무렵에 러시아의 페테부르크 황실 가극장의 위촉으로 리바스 공의 희곡<돈 알발바로>에 의한 <운명의 힘>을 공무의 분주한 틈을 타서 완성시켜 1862년 봄에 그 초연을 위해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으나 그 공연이 가을로 연기되어 그 사이에 런던의 만국 박람회에 참석 칸타타<여러 국민의 찬가>를 작곡 하였다.10월10일에 <운명의 힘>이 초연 되었으나 이 신작은  성공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1865년 국회의원을 사직하기까지는 <멕베스>의 프랑스어 개정 공연 이외에 별로 볼 만한 것은 없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에 실러의 희곡<돈 카를로스>를 메리와 뒤클로의 각색에 의해 작곡하여 프랑스어로 <돈 카를로스>5막이 3월 11일에 초연되었으나 이 작품은 1884년에 4막으로 개정하여 스칼라좌에서 이탈리아어로 공연 되었을때의 것이 오늘날 많이 공연 되고 있다.

그 해 여름 바레치가 사망하고 또 콤비로서 활약하고 있던 피아베도 세상을 떠났으나 더욱 더 베르디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은 1868년 11월 존경했던 로시니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1871년에<아이다>가 초연되었으며 그 이후의 작품은 바로 베르디의 완성기라고도 할 수있는 제3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1873년 나폴리에 체재 중 고전 형식의 전형으로서 현악 4중주곡e단조를 쓰고 이듬해에는 존경하는 시인 만초니를 위하여<진혼미사곡>을 완성하였고 그 1주기에 산 마르코 대성당<밀라노>에서 연주하였다.

오랜 작곡 생활에서 은퇴하여 산 아가티에서 전원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보이토가 섹스피어의 명작을 자기가 신봉하는 악극풍으로 각색하여 베르디에게 보여 주었고 이에 마음이 흔들들린 베르디는 7년이라는 긴 세월 끝에 1887년 2월5일<오셀로>를 초연 하였고 그 결과 신문들은 입을 모아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전혀 새로운 형식을 가져왔다"고 높이 찬양하였다.

그 이후 베르디의 섹스피어에 대한 관심은 더해져 그 다음 작품으로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과 <헨리4세>에 의한 <팔스타프>를 1893년2월9일 스칼라좌에서 초연하였는데 30회나 앙코르를 받았다고 한다. 이 무렵 부터 주세피나의 건강이 점차 나뻐져 1987년 11월 그녀는 죽고 만다.

베르디의 낙담은 눈에 역력히 보일 정도였으며 그 뒤<4개의 종교 합창곡>을 써 놓았을 뿐 창작 의욕도 현저히 떨어지고 말았다. 1901년 1월27일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에서 상의를 입으려는 순간 졸도하여 그는 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때 베르디는 87세의 고령이었다. 

그의 유해는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가 1개월 뒤 베르디가 음악가의 양로 사업을 위해 건립한 "휴식의 집"의 밀실에 주세피나 그리고 최훙후의 순간을 지켜 보았던 프리 마돈나 테레자 슈틀트르츠와 함께 매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