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 음악이야기

보로딘(Alexander porfir'yevich Borodin)

보로딘 (Alexander porfir'yevich Borodin 1833.11.12~1887.2.27)은 누구?


알렉산드로 브로딘(Aleksandr Porfir evich Boroodin,1833-1887)

오늘의 포스팅 주제의 인물도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곡가이다. 개인적 바램은  클래식 음악가들중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의 음악도 훌륭한 음악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보로딘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태생의 작곡가로 귀족루카 세묘노치 게데아노프와 군인의 딸 에브도키아 콘스탄티노브나 안토노바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나타내어 9세경에 엘레나라고 하는 자기보다 연상의 소녀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피아노 연탄용 폴카를 작곡하엿다고 한다. 그리고 프륫과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트 및 2개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마이베어의 오페라(도깨비 로베르)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 하였으나 이것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음악에 대한 흥미와 더불어 그는 소년 시절부터 화학에 열중하여 장래에 화학자가 되기 위해 1850년에 페테부르크의 과대학 약학과에 입학하고 1856년에 졸업한 후 육군 병원에서 근무했으며1857년국제 의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서 유럽을 여행하고 1858년에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 무소르그 스키를 알게 되어 그를 통하여 슈만의 음악을 소개 받고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57년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유학하고 이곳에서 훗날 러시아의 위대한 화학자가 되는 멘델레 예프를 만나고또 61년에는 그의 아내가 될 피아니스트인 에카테리나 세르게예프나 프로토포포포바(Ekaterina Sergeyerra Pro-topopova)를 얼게되어 얼마 후 약혼했다.

에카테리나 프로토포포바.1861년 봄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하는 동안 브로딘은 이 젊은 피아니스트와 만나 2년 후 결혼했다.

학생시절부터 첼로를 켰었던 브로딘은 바발라키레프(Mily Alexajewitsch Balakirew)를 알게되어 그의 친구인 무소르그스키(Modest Pettowitsch Mussorgski),큐이(C'esar Antono-vich Cui)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i Korsakov)와 함께 유럽의 전통적인 음악과는 다른 러시아의 국민적인 음악의 차창작을 이상으로 하여 <5인조>를 만들어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런러나 교직과 화학 연구를 하고 있는 그는 항상 다망하여 62년에 착수한 교향곡 제 1번을 완성한 것은 67년이었다. 그 초연은 69년 발라키레프의 지지휘로 이루어지고 호평을 받았으며 이 곡과 병행하여 1866녀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파르스<용사(Bogatyri)>를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세로프의 <유디트>의 변조(farce)로서 마이어베어 ,로시니,오펜바흐,세로프 등의 음악을 조금씩 빌려다 연결한 것이다.

그 초연은 1867년 모스크바에서 공개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악보는 분실되었다가 1922년에 발견되었다.1867년에 메이의 비극에 의한 오페라<황제의 신부>의 작곡을 시작했으나 곧 포기하고 말았으며 같은 해에 그의 가곡으로 유명한 <잠자는 왕녀>를 작곡 했다.

1869년 부터는 <5인조>의 이론적 지도자인 스타소프의 권유에 따라 러시아의 옛이약야기에 의거한 <이골공>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하기에 몰두하였으나 곡 중단하고 교향곡 제2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871년까지 교향곡의 제1악장은 작곡 되었으나 전체를 완성하기까지는 오랜세월이 필요하였다. 

1872년 화학 관계의 시찰을 마치고 독일에서 돌아온온 후 그는 의과대학에 여자의 산부인과 과정을 설립한다는 획기적인 제도 개혁을 위해 활약하였으며 그 발족과 동시에 화학의 강좌를 담당하는 등의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1874년 가을부터 현악 4중주곡 제1번을 시작하고 <이골공>도 다시 작곡을 시작하였다. 1876년에는 제2교향곡이 한꺼번에 완성되어 이듬해에 나프라브니크가 지휘한하는 러시아 음악협회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관악기에 편중하였으므로 실패하고 후에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오케스트레이션을 개정정한 것에 의해서 비로소 오늘날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77년 보로딘의 외유하는 길에 바이마르에서 리스트를 마만났났는데 이 곡을 보이자 격찬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80년에에 바덴바덴에 있어서의 제1교향곡의 연주를 비롯하여 서 유럽에 브로딘 음악을 소개하는 노력을 리스트가 하였다.

1879년 그는 귀국하여 현악 4중주곡 제1번을 완성하고 그 해 자선 음악 학교 연주회회에서 초연하기 위하여 <이골공>에 들어 있는<프로베츠인의 춤>과 몇 곡의 아리아를 완성하였다.

1880년에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를 작곡하고 곧이어 현악 4중주곡 제2번과 피아노를 위한 <소모음곡1878~85>을 완성하였다.1882년부터 쓰기 시작한 교향곡 제3번과<이골공>은 끝내 완성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오페라<이골공>은 브로딘이 작고한 후에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가 협력하여 완성하였다. 이 곡의 초연은 1888년2월14일에 페테르부르크(지금의 레닌그라드)에서 행해졌다. 또한 그의 교향시<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2세의 즉위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러시아의 민족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반주 음악으로서 작곡된 것이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3곡을 교향곡과 오페라<이골공>1곡의 스케르쵸,그리고 교향시<중앙아시앙아의 초원에서>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이골공>중의 <달탄인의 춤>은 특히 유명하며 그것만이 자주 연주 되는 경우도 많다.

브로딘은 러시아 국민악파의 한 사람으로서 유럽에서 가장 빨리 인정된 작곡가이지만 같은 <5인조>에 속하는 무소르그스키가 순수한 러시아어와 러시아의 민족적 음조직을 예술화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짙은 오리엔 탈리즘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러시아는 구소련의 공산국가에서 발전한 공산국만의 특유의 예술적 가치를 잘 보존하고 있으며 지금도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고 세계 각국의 음악 학도들이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하여 찾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