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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작곡가 슈만(Robert Alexander Shumann)

슈만(Robert Alexander Shumann 1810.6.8~1856.7.29)


                                                        독일의 저명한 작곡가 슈만

슈만(Robert Alexander Shumann 1810.6.8~1856.7.29)

1810년에 태어나서 19세기 전반의 걸쳐 활동한 독일 태생의 작곡가이다. 19세기는 전체적으로 보아 낭만주의 시대에 속해 있지만 우선 이 시대를 역사적으로 관찰하여 그 특징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이 세기는 사회적으로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노정한 시기인 동시에 세계사적인 관련에의 실마리가 풀린 시대로서 참된 세계사로서 20세기에 대한 준비였다고 볼 수 있다. 진보적 사상과 보수적 사상은 모든 면에서 격렬하게 서로 다투며 사회는 끝없는 불안에 빠져 있었다. 이와 같은 대립 대항이나 불안은 첫째로 두드러진 민주적 경향에 의하여 야기되었다. 즉 이제까지의 시대는 어떤 강력한 지배층에 의하여 전체가 지도되어 온데 대하여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자유주의가 보급된 결과 모든 계층이 역사의 담당자로서 등장하여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여 왔다.

그 각각의 계층이 각각의 정치적,경제적 배경에 의하여 진보적경향을 취하기도 하고 또는 보수적 경향을 취하여 서로 대항하여 왔다. 다음으로 일반적으로는 경제력의 커다란 발달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경제태세에 커다란 변화를 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를 발달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를 발전시켰다. 이것은 19세기가 지니는 대립적 양상을 격화시키고 나아가서는 끝없는 불안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본 바탕에는 유물적 경향의 신장이 있음을 관가하여서는 안 된다.

유물적 경향의 신장은 자연과학의 발달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즉 19세기의 자연과학의 발달은 산업 구조 뿐 아니라 여러가지 방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수많은 새로운 현상은 실증주의적인 진보 사상을 발전시켰으나 반면에 유럽 각국에서 찾아볼 수수 있었던 국가 통일의 기운,국력신장의 요청은 국민주의를 현저하게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국민주의의 발전은 19세기의 음악 발전에 강력한 하나의 기초가 된 것이다. 한편 사회 불안의 증대,전쟁 위기의 확대에 대해서 세계 평화를 바라는 움직임도 커져서 이와 함께 강한 종교적 경향도 나오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에 바탕이 된 사회사조는 국민주의와 개인주의의 두 가지였으며 자연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조는 음악에 대하여 거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 국민주의적 사조는 우선 모국어의 존중이라는 형태로 음악상에 나타났지만 곧 모국어를 매개로 하여 음악에 문학과의 강력한 연결이 생기고 음악적으로는 가곡, 표제음악, 오페라 등의 분야에서 극히 뛰어난 수많은 창조물이 나왔다. 또 개인주의 사조는 극단적인 개성존중의 형태를 취하여 여기에서 명기주의,환상성 등의 극히 강한 음악을 낳기에 이르렀다. 로베르트 슈만은 이상 이야기한 바와 같은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 1810년 독일 작센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스스로도 저술을 행한 서적상이었으며 어머니는 외과 의사의 딸로서 높은 수준의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

처녀시절의 클라라 비크,결혼식 전날 밤 슈만은 클라라에게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며 써 온 가곡집<미르테르의 꽃>을 선사했다.

따라서 슈만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며 민감한 감정은 어머니의 것으로 생각된다. 7세때 고향의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인 쿤취에게 피아노를 배웠는데 아주 빠른 진보를 보였고 11~12세 때부터는 피아노곡이나 합창곡 또는 관현악곡 등을 작곡하였다. 이 무렵 부친은 그를 베버에게 보내어 정식으로 작곡 공부를 시키려고 했으나 이것은 실현 되지 못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바이런을 비롯하여 낭만주의 문학가들의 작품을 애독하고 특히 장 파울 리히터의 환상적인 작품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826년 부친이 사망하였으며 모친은 로베르트를 라이프치히의 대학에 보내어 법률 공부를 시켰다.그러나 그는 법률보다도 철학에 흥미를 갖고 칸트나 셀링,피히테 등의 관념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였다.그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티보 교수에 이끌려서 전학하였는데 20세 때에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자기가 나아갈 길은 음악 이외는 없다는 점을 통감하였다.

그리하여 1830년에는 모친의 허락을 받고 라이프치히로 돌아가서 당시 저명한 피아노 교사였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집에 기숙하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동시에 도른에게 작곡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흥미위주의 피아노 교습이었다. 그러나 손가락을 지나치게 혹사한 결과 오른손을 다쳐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자곡과문학적 노작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주로 피아노곡으로서 나타났는데 1840년까지에 op.1에서서 op.23에 이르는 수많은 피안 곡이 자곡되었다. 이들 작품은 가장 중요한 것에 속하며 슈만의 독창성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1834년 즉 24세 때에 음악 비평에도 착수하여 크렐.L.슝케 및 비크와 함께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라는 음악 잡지를 창간 하였다. 슈만은 이 일을 1844년까지 계속하였는데 당시의 보수적이며 상투적인 음악에 대항하여 자유롭고 새로운 음악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는 자기들의 그룹을 "다윗동맹(David bun)"이라 이름 짓고 이에 대하여 보수적인 그룹을 "필리스틴(Philistines)"이라 이름을 지었다.

본의 엔데니히에 있는 정신 병원. 슈만은 이 병원에서 정신병을 치료하다 회복을 못하고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현재는 개수 되어 슈만 기념관이 되었다

슈만은 "플로레스탄", "오이제비우스", "마이스터 라로",등의 필명 및 "2","12"등의 숫자로써 음악 논문이나 음악 평론을 썼는데 이는 극히 높은 가치를 가진  큰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쇼팽,멘델스죤,브람스,베를리오즈,등을 세상에 소개하고 이들의 새로운 음악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특히 브람스에 대하여는 유명한 "새로운 길"이라는 논문을 써서 이 젊은 자곡가를 세상에 소개 하였다. 이 논문은 1853년에 썼으므로 그의 만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슈만은 비크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게 되면서 부터 그의 딸인 클라라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클라라의 부친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1840년 그가30세 때에야 겨우 결혼 할 수가 있었다. 결혼을 하나의 전기로 하여 그는 피아노곡 분야에도 눈을 돌려 다숭수의 가곡을 썼다. 그는 이들 가곡에 있어서도 슈베르트의 전통을 더 한층 발전시켰으며 이어서 교향곡이나 실내악곡에도 손을 대었다. 이들 분야에 있어서는 모든 작품이 성공적이라고 말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브람스의 고전주의적인인 작품은 슈만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슈만이 투신했던 라인강.관광객들이 보트를 타고 있는 모습

그 중에서도 현악 4중주곡, 피아노 5중주곡,피아노4중주곡은 걸작이라 할 수있다. 1843년에 멘델스죤은 라이프치히에 음악 학교를 세웠는데 슈만은 그곳의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이 직업은 그에게는 부적당하여 짧은 기간으로 이 근무처를 떠나고 말았다.이 사이에 클라라와 함께 러시아로 연주 여행을 다녀왔다. 음악학교의 강사직을 그만둔 뒤 라이프치히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가서 1850년까지 머물면서 개인교수와 창작으로 나날을 보냈다.1847년에 "리더타펠"의 지휘자가 되고 이듬해 48년에는 "코르게장그펠라인"을 조직하였다.

1850년 힐러의 후임으로 뒤셀도르프시 관현악단 및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어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젊은 시대부터 그 징후를 보이고 있던 정신 착란이 점점 더 심해져서 1853년 가을에는 지휘자의 지위를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이 사이에 클라라와 함께 라이프치히,네델란드,하노버 등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다.1854년 2월6일 그의 병은 최악의 상태에 달하여 집에서 빠져나와 라인강에 투신하였다. 그 후 본 교회의 엔데니히의 정신 병원에 들어간 채 마침내 회복하지 못하고 1856년 7월29일 46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끝마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