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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베버(Carl Maria Von Weber)에 관하여

베버(Carl Maria Von Weber.1786~1826)


오늘의 포스팅 주제의 인물은 초기 낭만파 음악의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1786년 11월 18일 오이틴에서 출생한 베버의 이야기이다.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베버는 자유 분방한 집안의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활동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번도 안정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어 때로는 가난에 쪼들리기도 했는데 그런 그가 아들 베버를 천재 소년으로 길러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방랑생활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지속된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베버는 10세 때에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그 뒤에는 중단되는 일도 있었으나 찰츠부르크의 "요한 미하엘 하이든"과 빈 수도원 원장"게오르크 요제프 포글러"에게 작곡을 배웠다.

12세 때에 작곡하여 1798년에 찰츠부르크에서 출판된 작품1의 피아노를 위한 푸게타 6곡에는 미하엘 하이든의 가르침의, 특히 보수적인 면이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도원장 포글러의 영향이 오히려 본질적으로 보다 깊은 것이었음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이 스승에게서 신출내기 작곡가 베버는 신기한 악기의 편성법과 그리고 극장풍의 효과를 배워 음악 개혁에 관한 이념을 알게 되었다.

12세 때부터는 찰츠부르크 교회 합창단원으로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그리고 13세 때에는 이미 오페라를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의 이러한 재질은 해를 거듭함에 따라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발표 하였을 때에는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로서만이 아니라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유명한데 프라그 극장의 지휘를 비롯하여 1817년 이 후로는 드레스덴 궁전 가극장의 지휘자로 활약했다. 그가 음악에 크게 공헌한 것은 극 음악 분야이다. 그는 극적이고 서사적인 표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베버는 2개의 교향곡을 남겼지만 그보다 교향시 방면의 새로운 개척으로 새싹을 트게 하여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그가 택한 멜로디는 모차르트의 흐름을 따랐는데 부드럽고 아름다운 가락에 풍부한 영감적인 기백이 있다. 또한 품위 있는 깨끗한 멜로디에는 개성이 뚜렸이 나타나 있고 대담한 화성의 사용이 그것을 뒷받침 해 준다. 그의 오페라 작품으로는 <마탄의 사수><오이리안테><오버롯>등이 있다. 

베버가 1819년에 작곡한 <무도에의 권유>의 초기 출판 악보,아내에게 바친 이 곡은 낭만파 연주회용 왈츠 중 가장 빛나는 작품중의 하나이다.

20세 때는 그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주드비히 공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그의 재능은 인정정되었고 공의 자녀를 가르치는 한편 음악가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베버는 이 때부터는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더구나 베버를 찾아온 그의 아버지가 공금을 쓰는등 횡령의 혐의를 받아 1810년 아버지와 함께 추방되고 말았다. 그는 만하임에서 다름슈타트로 갔다.

베버는 거기거 옛 생활을 청산하고 작곡 연극등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정진 하였다.1813년 1월 프라하가극장으 지휘자로 부임하자 그 때까지의 방탕 생활은 끝내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어 7년 후에는 카를리네 브란트와 결혼하였다.1816년에는 드레스덴의 작센 궁정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는데 이 시대의 작품에는 피아노곡,종교극,가곡 등이 많았다.

1823년 빈에서 초연한 <오이리 안테>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악화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 하였다. 한편 파리 런던으로부터 새로운  가극장의 창작을 의뢰받았는데 조건이 유유리한 런던에서 초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몸이 쇠약한데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를 초연, 지휘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는는데 공연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객사 하였다.

그의 유해는 성 마리아 교회에 매장되었다가 18년후인 1844년 아들 막스에 의해 드레스덴으로 옮겨졌다. 그의 피아노곡<무도회의 권유>등에 암시되된 표제성과 극적적인 정열은 그가 분명 낭만파 작곡가임을 입증해 준다.

그는 고전파 시대에 살면서도 낭만적인 새로운 방향을 시사해 주었닥다고 하겠다. 그의 작품은 9개의 오페라와 2곡의 교향곡,축전 서곡,2곡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소협주곡,클라리넷 협주곡 그 밖에 성악곣과 기악곡을 남겼다.

<무도회의 권유>는 1841년 베를리오즈가 관현악으로 편곡했는데 다시 바인 가르트너가 근대 관현악곡으로 개편 연주했다. 그의 멜로디는 모차르트의 흐름을 따라 유연하고 자유분방한데 대담한 화성법과 품위 있는가락에는 강한 개성이 담겨 있다. 악기 사용법에 있어서는 가장 낮은 데서부터 갖가장 높은 음역을 자유 자재로 구사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베버의 기악곡곡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에 속하는<무도외의 권유>는 1819년에 작곡되어 사랑하는 아내인 카롤리네에게 바쳐졌다.이 곡은 피아노 독주용 곡인데 오늘날에는 베를리오즈가 관현악용으로 편곡한 것으로서도 지고 있다. 원래 베버는 이 곡에<화려한 론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베버의 <마틴의 사수>

서서주와 코다를 갖는 자유스러운 론도 형식을 취하는데 이것은 차라리 춤곡의 전후에 서주와 코다를 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춤곡은 왈츠의 리듬을 취하며 갖춘마침으로 다시 작은 춤곡으로 나뉘어진다. 작은 왈츠의 연속이라는 방법 그리고 왈츠의 서주를 붙인다는 면에서 훗날 요한 슈트라우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곡도 베버가 즐기는 표제적인 경향을 취하고 있다. 같은 소품 피아노곡에 극적,표제적 요소를 채용했다는것과 춤곡을 예술적인 피아노곡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낭만주의 시대의  기사성,시정,우아함도 짜여져 있다. 피아노의 방법은 매우 화려하며 그야말로 오페라 작곡가 베버의 것으로 알맞다. 베버는 4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는데 관현악적인 색채가 뛰어나고 극적인 박력에 차 있으며 매우 화려하다. 슈피타가 말했듯이 소나타 형식의 환상곡과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다. 전체적으로 잔기교는 없고 자연 그대로이며 민족적이다. 리듬은 명쾌하며 때로는 정열적,추진적이기도 하다. 화성은 서로 닮은 필법이 많은데 색채적으로 풍부하며 전체적으로 낭만적인 정열이 넘쳐 흐른다.다만 건실한 구성과 충실한 전개 베토벤 풍의 깊이 슈베르트 풍의 서정성이 약간 부족하다고 하겠다.

전4곡 가운데서 제1번 C장조와 제2번 내림A장조가 가장 뛰어나며 널리 알려져있다. 제1번 C장조는 1812년 연주 여행 중에 작곡되어진 것으로 바이마르 체류시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던 대공과 그 양녀 마리아 파울로브아에게 헌정되었다.조연 시기는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 작곡가 자신이 초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1813년에서 1816년까지 베버는 프라하의 국립 가극장의 지휘자로 있었다. 이 최후의 해에 제2번 내림A장조 소나타가 생겼다. 이 무렵의 작품에는 연애를 위한 것,유쾌하고 즐거운것,혹은 극적임이며 사람람의 마음을 끌어담는 것 등이 많은데 제2번 내림A장조가 좋은 예이다. 이것은 1816년 작곡되어진 것을 푸랑수아 라우스카에게 헌정되었다. 한편 지휘자로서 베버는 근대 지휘법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지휘봉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다.

베버의 작품이 남긴 흔적은 당대 음악사에 깊이 새겨져 있는데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에게 오케스트라가 가지는 가능성과 악극의 어법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 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극장을 통괄하고 상연 계획을 이안하며 음악에 관해서 진필을 휘드르는 베버는 바그너의 본이었으며 교양을 갖춘 사색하는 음악가의 원형이 되었다. 베버는 또한 오페라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자작품이 많은 데 독일의국민적 감정을 힘차게 표현한 가곡이나 클라리넷을 위한 여러 작품이나 그 중에서도 표제 음악의 싹을 트게한 <무도에의 권유><콘체르트슈튀크>f단조를 포함하는 많은 피아노곡은 중요한 것들이다.풍만한극적 효과와 화려하고도 다양스러운 색채미를 발휘하는 이들 베버의 성악,기악곡은 낭만중주의 음악의 새벽종이었으며 뒤의 많은 낭만파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암시한 것이었다.

건강과 생활에 항상 시달린 그는 페르골레지,모차르트,슈베르트,쇼팽,멘델스죤처럼 젊어서 사라졌으며"자유의 사수"에 의해 불멸일 뿐 아니라 음악 역사에 끼친 그의 공헌으로도 길이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