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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야기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에 관하여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베토벤은 1770년 12월 본에서 태어났다.이 무렵 본은 인구 3만이 채 안되는 자그마한 도시였으나 퀼른은 선제후의 궁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문화적으로 비교적 발전된 곳이었으며 또한 음악도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요한은 궁정악단의 테너 가수였지만 술주정때문에 인격적인 파산자 비슷했다.루트비히에게 일찍부터 나타난 음악적 재능을 포착해서 4세때 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다, 그 결과 8세때 챔발로 연주회를 가졌는데 그에게 정규적인 선생이 필요하다는것을 깨달았다. 이무렵 부터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궁정악장 등에게 배우게 되었고 크리스티안 고틀리프 네페란 사람에게서 제대로 기토를 배울 수 있었다.

베토벤의 탄생.게제르사프 원화

1787년 봄..그는 빈에 갔다.

동경하고 있던 모짜르트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모짜르트는 그의 연주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그 해 7월 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본으로 돌아 왔다. 그 후 5년 동안을 본에서 지냈으며 92년 요제프 하이든이 런던 여행에서 돌아오다 본으로 들렸을때 베토벤의 칸타타를 듣고 그 재능을 칭찬해 준것이 계기가 되어 본 궁정의 발트슈타인 백작의 노력으로 궁정에서 학비를 받아 또 다시 빈으로 갔다. 그의 본 시대의 작품은 피아노곡,실내악,칸타타의 부문에 걸쳐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그러나 아직 습작 시대의 것으로서 작품 번호도 붙어 있지 않고 지금까지 관리되지 않고있다. 그러나 그가 빈을 두번째 방문 했을 때에는 모짜르트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는 백작의 추천으로 하이든에게 약 1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발트슈타인 백작이 뒤에서 베푼 힘은 베토벤의 공부에 올바른 길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작이 빈 사교계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그는 직접 사교계에 참가하게끔 되었다. 베토벤은 이러한 은혜와 의리를 생각하며 1805년 출판된 OP 53피아노 소나타C장조를 백작에게 바쳤다. 오늘날 이것은 <발트슈타인의 소나타>라 불리고 있다. 베토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귀족으로는 우선 카폰 리히노브스키 후작작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다. 후작은 부인인 크리스티아넹네와 함께 베토벤이 빈에 있어서 초년 시대의 열렬한 후원자로서 베토벤은 한때 후작의 저택에서 살면서 초기 시대의 많은 작품을 후작에게 바쳤으며 OP 1의 세 개의 피아노 3중주곡 OP 13의 비창 소나타 c단조,OP 26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OP 36의 교향곡 제2번 등 또한 많은 작품이 후작의 살롱에서 초연 되었다.라주모브스키 백작은 초기부터 중에 걸친 열렬한 후원자였다.백작은 자택에서 시판치크를 주도자로 하는 현악 4중주단을 가지고 수시로 백작 자신이 연주에 가담하여 제 2바이올린의 파트를 맡았다.OP 59의 세 개의 현악 4중주곡은 백작에게 바친 곡으로서 오늘날<라주모브스티 4중주곡>이라 불리는 것이다.

베토벤의 초상화

 

빈 시대의 베토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귀족은 요한 요제프 라이너 루돌프 대공이었다. 베토벤과는 평생 우정을 돈독히 한 유일한 귀족이며 작곡 제자로서도 유명한 존재였다. 그에게 바친 작품의 수는 지극히 많은데 그 중에서도 OP 58의 피아노 협주곡 제 14번 ,OP 72의 오페라 <피델리오>,OP 81a의 <고별 소나타>,OP 97의 피아노 3중주곡 B장조<대공>,OP 106의 <하머클라비어 소나타>등이 있으며 특히 그의 심혈을 기울인 대작 <장엄미사>는 대공의 대사교 취임을 축하해서 작곡한 것이다.

1808년의 가을 베스트팔렌의 왕 제롬롬이 그의 카셀의 궁정에 배토벤을 연금 600금화 두카텐으로 초빙하고 싶다는 청을 해왔다.이 때 빈의 세 사람의 귀족(루돌프 대공,로코프비츠 후작,킨스키 후작)이 그를 위해 연금 4천 그루텐을 내어 그의 평생의 생활을 보장하려고 했다. 이계약서는 1809년 3월 1일에 작성되어 당사자 네 사람의 서명이 되었으나 그 후의 사회 정세의 변화와 귀족들의 몰락 때문에 로프코비츠 후작은 1811년 부터 킨스키 후작은 1812년부터 지불 능력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의의 소송에 의해서 약간의 지불을 받을 수가 있었으나 여기에서도 계약을 최후까지 이행 할 수 있었던 것은 루돌프 대공 뿐이었다. 

바덴헬라나 계곡의 프롬나드<제9교향곡>을 작곡한 집 

OP 55의 교향곡 제 3번 <영웅>은 로프코비츠에게 바친것이었으며 OP 86의 미사곡 C장조는 킨스키 후작에게 바친것이었다. 베토벤은 귀족의 여성 이외는 제자를 가지지 않았다. 남성 제자로는 빈에 있어서의 초년 시대에 같은 고향 출신인 페르디난트 리스와 카를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적이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체르니는 많은 실용적인 피아노의 에튀드를 쓰고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 연주법에 관해서 저술을 남긴 훌륭한 제자이다.

베토벤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바라던 바는 아니었고 그가 사모한 여성은 거의 귀족 출신으로서 신분의 차이가 있었고 또한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이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의 OP 27 no.2의 피아노 소나타 c단조<월광>소나타,OP 57의 <열정>소나타,OP 78의 <테레지아> 소나타는 그가 사모하던 여인에게 바친 곡이었다. 중년 이후의 베토벤에게 커다란 비극을 안겨준 것은 그의 귓병이었다. 그가 1802년에 쓴 유서에 의하면 "나는 요 6년 이래 이 불치의 병으로 괴로워 하고...."로  되어 있어 이것이 사실이라 한다면 이미 26~7세 무렵 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1800년 경부터는 차츰 병세가 악화해서 20년 무렵에는 아주 이 세상의 소리로부터 절연되어 버렸다. 그가 죽은 후 불멸의 애인에게 보낸 연애편지와 함께 앞에서 말한 유서도 나온 것이지만 전체적인 문맥으로 살펴보면 차츰 들리지 않게 된 귓병을 비관했던 것 같다.그는 자살을 주저하여 이 편지도 유성의 구실을 할 수 없었으나 그 일부와 장소가 "하일리겐 슈타트,1802년10월6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통칭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 불리고 있다.그리하여 그 후의 베토벤에게는 악화 일로를 거걷는 귓병 때문에 사람과의 교제에도 새생활상상에도 창작상에도 많은 지장을 초래 했다.근느 차츰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게끔 되고 남들은 그를 점점 이상한 사람으로 대하게끔 되었다. 그는 1812년에 테프리츠의 온천장에서 괴테와 회견을 하였는데 이때 괴 괴테가 알린 편지를 보면 "그의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은 정말 동정할 만한 일 이었으며 음악을 위해서는 교제면에서 생기는 정도의 장해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무뚝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결점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라고 말 하고 있다. 제 9교향곡이 케른트나토아 극장에서 초연되던 24년에는 청중의 열광과 박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서 독창자인 웅가르가 소매를 당겨 청중의 갈채를 보여 주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귀병이 심해짐에 따라서 30세를 넘기고 나서부터는 매년 초여름 부터 가을에는 교회를 떠나 빈의 교외나 더 떨어진 시골에서 지내게 되었다.

옛 빈 대학교 이곳에서 제7교향곡 작품92의 초연을 지휘했다.

1800년이 지나고부터는 하일리겐슈타트를 중심으로 하여 여름을 보내면서 귓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때 씌어진 것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이며 OP 57의 <열정>소나타,교향곡,제 6번인 <전원>이다. 하일리겐슈타트 일대에는 이 시대에 그가 살던 집이 아직도 대여섯 채 남아있고 그가 거닐던 길이나 시내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숲이나 골짜기를 거닐면서 창작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대자연을 겉는다는 것은 "신과 대화한다"는 것이었다.그럼으로써 영감을 얻었고 만년이 됨에 따라 여름철 정양지로서는 더 먼 곳을 택했고1818부터는 매년 메들링에 가서 오스트리아의 스위스라 불리우는 브릴을 산책하면서 만년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고 <장엄미사>를 작곡곡했다.21년부터 다시 바덴으로 가서 헬레나 계곡을 헤매며 <제9>의 완성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만년에는 더욱더 심해지는 귓병에다 심적 부담도 많았다. 또 하나의 걱정거리는 특히 조카 카를의 일을 들을 수있다.

베토벤은 빈으로 와서 자기으 생활이 안정되고 나자 고향에 있는 두 동생 카를과 요한을 빈으로 불러 돌보아 주었다. 카를은 세무서 관리가 되어 자활하게 되었으나 1815년11월15일에 에 죽고 유서에 따라 그의 외아들 카를(동명)의 후견인이 되었다. 이 소년은 소행도 나쁘려니와 학업도 게을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이 무렵 그가 이 소년의 선도를 위해 카를에게 낸 편지는 28통이나 된다. 이 해 가을 카를을 데리고 도나우강의 상류에 있는 그나이센도르프로 동생인 요한을 찾았다.

베토벤 광장에 있는 베토벤 동상

 요한은  그곳에다가 커다란 자택을 마련하고 유복한 살림을 하고 있었으므로 만년의 그가 정양ㄹ을 겸해 동생의 생활도 보고 아울러 카를의 기분전환을 꾀하려고 했었다. 그는 이 고장에 머무르던 2개월의 체재 기간 중에도 겨울 하늘이 내리덮인 일대를 거닐면서 op 135의 현악 4중주 곡과 op 130의 <가리친>4중주 곡등을 작곡 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에게 있어선느 동생 집에서 기거하는것이 마음에 안들었는데 그것은 계수와의 사이가 좋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이 일을 견다다 못한 베토벤은 우유 마차를 타고 돌아가기로 하였는데 도중에 발열학하고 결국 이병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원인이 되엇다. 카르도 1주일 후에 요한 과 함께 마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왔다. 그 후 베토벤의 병세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계속 악화하여 27년 3월에는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본 시절부터의 어린린 친구였었던 궁중 고문관인 스테판 브로이닝의 지시에 따라 3월23일에는 "조카인 카를은 나의 유일한 상속자이며 나의 유산은 필연적으로 또 이 유서의 지정에 의하여 그의 소유가 된다"는 유서의 추신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절필이 되었다. 그 3일 뒤인 1827년 3월 26일에는 드디어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었다.향년 56세, 그의 무덤은 지금 빈의 중앙묘지에 있다.

슈베르트가 신처럼 동경한 베토벤...비록 슈베르트와의 만남은 잠깐이었지만 일생일대의 가장 강렬한 시간이었을거라 추측한다.베토벤은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 다"는 말을 남겨 후대에 이르게 되었고 그가 얼마나 기타연주를 좋아하고 작곡에 사용 하였을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지만 분명한건 슈베르트가 베토벤의 영향을 받고 기타로 많은 곡들을 작곡한 것은 확실하다.